“특히 2년여에 걸친 극심한 한해로 인해 주변에서
단돈 100만원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부동산을 처분하였지요.”
“상황은 어렵고 개점은 얼마 남지 않아서 은행의 전표,
장표는 물론 규정을 만드는 등 업무가 많았습니다.
개점 전날인 11월 19일에는 꼬박
날을 새야 했을 정도니까요.”(1968년 창립)
“직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더라구요.
참 어려웠던 시대에 노조 창립이라니
지금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까 싶어요.”
(1975년 노조설립)
“당시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며칠이 걸렸지만
광주은행에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취급이
가능했었죠.”(초창기 대출취급)
“사무개선부장으로 근무했을 당시 전 지점에 타이핑기기를
지급했었죠. 이것을 먼저 사용해야 전산판에
익숙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지점에서는
타이핑기기만 주면 어쩌라는 말이냐며
타이퍼라이터를 달라고 했었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어요.”(1983년 전산화)
“뱅크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죠. 광주은행을 위해 애써주신 그런 분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1999년 뱅크런)
“근속 20년을 기념하여 은행에서 준
은쟁반(감사패) 중앙에 있는 금장식이랑
아이들 돌반지까지 가져다가 동참했죠.”
(1998년 금모으기 운동 당시)
“저야 은행 간부였으니까 노조원이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조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죠.
그래서 재직증명서에 그냥 도장 찍어줬어요.”
(1975년 노조설립)
“노동조합 창립에 며칠을 준비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급하게 다른 장소를 찾느라 애먹었어요.
임시추진위원회 막내인 제가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죠.”(1975년 노조설립)
“개발기간에는 정말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일년에 이틀정도 밖에 쉬지 못했으니까요.
젊은 직원들의 패기로 견뎌냈죠.”
(1994년 다운사이징 전산시스템 개발)
“전산화가 되기 전 결산을 할 때면 수일을 날을
새야했어요. 지방에 있는 지점 담당자들은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수치가 맞지 않으면
다시 되돌려보내야 했었죠.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1987년이었던 것 같네요.
수기(手記)로 연말 결산 작업을 하면 보름이 걸리는데
그 해에 처음으로 하나SP프로그램을 이용하니
닷새 만에 끝나더라구요.”(1987년 전산화 과정)
“그때는 과장도 부장같이 책임감을 갖고 일했어요.
은행이 위기에 처했는데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열심히 일하던 시기였죠.”(1990년대 후반)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대출 받아 샀던 주식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거기에다 구조조정까지 당해버린 직원들이 다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슴 아파요.”
(1998년 1,000억원 유상증자)
“당시 우리은행 강당에서 진행 했었어요.
발표하는 모습을 뒤에서 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2002년 4월 A.T,Kearney 기능재편보고서 발표)
“90년대 송병순 은행장 시기 학습된 DNA를 통해
평균적인 직원들의 수준이 타 은행 직원들에 비교하여 앞섰어요.
우리금융지주에 포함되어서도 IT분야 등은 우리가 앞서있었죠.
여러분들은 자긍심을 갖고 다녀도 돼요.”
(우리금융지주 편입 후)
“액면가 이하로 신주를 발행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예금 금리도 보전해주고, 대출 금리도 보조해주자는 의견이 나왔죠.
성공적인 유상증자로 다른 금융기관들의 부러움을 샀어요.”
(1998년 1,000억원 유상증자)
“1994년에 서무원부터 임원들까지 전 직원이 2박3일
일정으로 연수를 갔던 ‘동경180’은 선진국인 일본의
직원들이 고객을 어떻게 응대하는지 서비스 마인드를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었죠.”
(1994년 동경180)
“광은경영경제연구소는 경영진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주기도 했어요. 새로운 정책방안이나
투자 등을 실행하기 전 검토하는 역할도
많이 했죠.”(1994년)